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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Band 1986-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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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BAND 1986-2016
국립현대미술관 / 경기도 과천시 광명로 313
02-2188-6000 / www.mmca.go.kr
2016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개관 30주년을 맞아 제작된 라이팅밴드는 미술관 사진 아카이브에서 출발한 글쓰기로 미술관의 여러 시간대를 동시에 불러오는 시도이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미술연구센터




1991년 9월 4일 소련 문화성 국장 방문


현시원



소련 문화성 국장이 대한민국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사무동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 사진이 담긴 파일의 제목은 ‘소련 문화성 국장 방문’이다. 1991년 9월 4일 오후 2시였다. 소련 문화성 국장은 의자에 앉아있다. 한국과 소련의 수교가 맺어진 이듬해의 시간이었다. 소련 문화성 국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를 만나기로 했다. 소련 문화성 국장은 대한민국 화가 중 김흥수 화백(당시 72세)을 만나기로 했으며 그의 호방한 기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문화성 국장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소련 문화성 국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련과 한국 미술의 관계,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작가의 러시아 전시 추진, 장기적 문화교류 계획.

“이 그림을 얼마면 러시아로 가져올 수 있겠소? 이 그림 속의 풍경은 나의 고향 뻬레사이카의 한 장면을 닮았소.”

대한민국 생존 화가 중에 가장 키가 크며 그럴듯한 수염을 기르고 있고, 목소리 또한 흠잡을 데 없이 큰 김흥수 화백은 러시아 문화성 국장과의 만남을 만끽했다.

“내 그림 어떤가요? 내가 추구하는 세계를 하모니즘이라고 부르오.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큰 그림을 이 강렬한 화면 색채와 구도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질문하곤 하는데. 음. 그것은 나도 내 자신에게 물어보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오.”

러시아 문화성 국장은 오른손 엄지를 추켜세웠다. 김흥수의 붉은 색 그림 앞에서 있을 수 있는 한 가장 오랜 시간을 서서 오직 그림만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했다. 정말 뛰어나다는 표정과 함께 당신의 예술 세계를 러시아로 데려가고 싶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왼손을 양복 주머니에서 뺄 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가 김흥수의 그림보다 흠뻑 매력에 빠진 것은 고희동의 ‹자화상›(1918) 옆에 걸린 이종우의 그림이었다. 1899년 그러니까 19세기의 마지막 연도에 태어나 한국 최초로 프랑스 미술 유학을 떠난 자라고 했다. 아, 이 이종우라는 자의 그림에 있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인형을 보자. 이 인형은 우리 어머니가 물려주신 그것과 비슷한 모양인 걸. 자세히 보니 인형이 아니라 인형이 그려진 작은 상자로군.
이종우의 ‹인형 있는 정물›은 2016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 이렇게 남아있다. 1927년에 그려진 53.3 × 45.6 cm 의 그림이다. 1

1 • “설초(雪蕉) 이종우(1899-1981)는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온 우리나라의 근대 작가이다. 초기에는 서양적 표현기법에 의한 엄격한 사실주의적 인물을 많이 그렸으나, 후기로 오면서 남화적인 분위기의 풍경을 주로 다루었다. ‹인형 있는 정물›(1927)은 그의 다른 인물상들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조형성이나 고전적인 갈색조와는 다른 명랑하고 밝은 색조의 정물화이다. 또한 화면의 치밀성은 유리 속의 인형을 포함한 탁자 위의 정물들이 화면 가득히 묘사되고 있는 것과 왼쪽 벽면의 타원형 거울에 인형상자의 뒷면 모서리가 투영된 것까지 그려 넣은 점에서 엿볼 수 있다. 조형적인 통일성과 균형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1992년 11월 22일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1992년 11월 18일 옐친 대통령과 함께 국립 푸슈킨 미술관 이리나 안토노바 관장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당시 소장품 56만 5천 여점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 최대 미술관 중 하나인 푸슈킨 미술관의 이리나 관장은 특히 김흥수 작가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피력했다.

이듬해 계획은 실현되었다. 김흥수 화백은 1993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에서 큰 규모의 개인전을 가졌다. 1993년 4월 11일 자 동아일보에는 김흥수가 쓴 회고가 실렸다. 1919년에 태어난 작가가 1993년도에 꾸었던 꿈은 2016년 8월 끝난 것일까, 끝나지 않은 것일까. 또 어떤 변화를 기다려 볼만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접힌 과거일까. 더 낙담하거나 더 기대할 것이 아직 남아있을까.

“나는 이달 말 러시아로 간다. 동양 작가에게 처음 문호를 여는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준비하며 나는 세계적인 화가를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떠올려 보았다. 누구인들 소년 시절 야망이 없으랴만은 나는 선전에 입선했던 열일곱 살 때부터 ‘몇 살에는 선전 심사위원, 몇 살에는 세계적 작가’ 하는 식으로 미래를 설계하며 살았다. 그리고 추상 회화에 처음 접했던 젊은 시절에도 추상 이후에는 무엇이 세계 화단을 사로잡을 것인가 골똘히 궁리하며 대안을 찾아 헤맸다. 그것이 바로 내가 주창한 조형주의(造形主義), 하모니즘이다.”

소련 문화성 국장이 과천을 찾은 지 십 년이 흐른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는 ‹러시아, 천년의 삶과 예술›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문화성 국장은 그 사이 밀수입 스캔들로 국장에서 물러나 낙향한 상태였다. 일요화가의 꿈을 꾸던 문화성 국장은 십 년 전 한국에서 만났던 키가 큰 화가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직장에 나가는 대신 강가에 나가 붓을 든다. 그 또한 어린 시절 보았던 누이를 그려 보려고 한다. 그에게도 나름의 하모니즘이 있다.





1991년 9월 4일 소련 문화성 국장 방문




2001년 7월 8일 러시아, 천년의 삶과 예술

현시원

‹러시아, 천년의 삶과 예술› 전시에서 케이터링을 맡은 곳은 을지로 3가 146번지에 위치한 한 케이터링 업체였다. 오렌지 쥬스와 포도 쥬스를 각각 10병, 5병 씩 준비해 갔으며 테이블 배치에서 오렌지 쥬스 2, 포도 쥬스 1, 오렌지 쥬스 2, 포도 쥬스 1, 이렇게 3 잔의 쥬스가 세트를 이루는 배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냐면 1 더하기 1은 2, 그리고 다시 1을 더하면 3이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 천년의 삶과 예술› 오프닝에 초대받은 반기문은 사실 러시아에 대한 큰 감흥이 없었다. 주 오스트리아 대사관 대사를 역임하고 외교통상부 차관이었던 때였다. 반기문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한동 국무총리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이 참여했던 수많은 경연대회의 기억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미술과 예술에 관한 기억이라면 고등학교 시절 그림대회에 참가하여 딱 30분 동안 그림 그리기에 초집중하였던 순간이었다. 반기문은 1962년 충주고 3학년 때 대한적십자 사가 주관한 전국학생영어웅변대회에 출전해 대상을 탔다. 그러므로 이 글은 반기문의 위인전이 2016년 현재 초등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텍스트라는 사실에 기대어 있다.




2001년 7월 8일 러시아, 천년의 삶과 예술














1987년 2월 28일 청년 작가 전

현시원



1987년 2월 28일 청년이라면 모름지기 바바리코트를 입어야했다. 청년이라면 모름지기 노인과 대화할 때 양복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턱을 치켜들며 상대를 바라봐야 했다. 도전과 존경을 같이 갖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사진 속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고개를 계속 반복적으로 20회 이상 끄덕였다. 청년은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여성 작가는 1/10 수준이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청년이라면 모름지기 허리띠를 푼 채로 바바리코트를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머리의 길이는 장발도 단발도 아닌 애매한 상태여야 했다. 청년작가라면 누구에게도 쉽게 읽혀지는 코드는 지양해야 하기 때문에 1987년 2월 28일의 청년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채로 도자기에 든 몹시 뜨거운 녹차를 마셔야 했다.

2010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1981-2010 젊은 모색 三十› 전이 열렸다. 1981년 ‹청년작가› 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신진 작가들의 전시가 1990년 ‹젊은 모색›으로 개명한 후 2010년에 이르는 30년의 역사를 총괄하는 전시였다. 도록에 ‘살아있는 정신에게’라는 제목의 기획 글을 쓴 이추영 학예연구사는 “미래의 도약을 위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시점에서 327명 역대 전시 참여 작가들의 독창적이며 실험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진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히며 “이들의 한국현대미술사의 거대한 흐름에 미친 영향과 활동에 대한 조명과, 냉철한 평가는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전의 성과와 존재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가 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2010년 출간된 도록 속의 1987년은 이렇게 기록된다.

“제 4회 청년작가 1987년(2.28-3.29)
1986년 8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시대를 개막하면서 본격적인 미술관 운영체제에 돌입한다. 1987년은 정치적으로 민주화 투쟁이 뜨겁게 일어났던 시기였다. 박종철, 이한열군 고문 사망 사건이 터졌고, ‘6월 민주항쟁’과 ‘6.29 선언’이라는 숨 가뿐 사회적 변혁의 시기였다. 당시 추진 위원이었던 윤우학은 ‹청년작가›전의 개최와 관련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이 화단전반에 깔려있던 보수성과 경직성으로 미술관의 기능과 역할이 여지없이 권위주의적이었음을 지적하며, 국립현대미술관이 스스로 권위의 담장을 허물고 청년작가들에게 새롭게 눈길을 주었음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1986년 이후 과천으로 이전 재개관한 미술관이 넉넉한 공간을 제공한 점도, 젊은 작가들이 본인의 작업을 적극 펼칠 수 있게 되었음을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참여작가들은 당시 젊은 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경향으로 떠오르던 설치 형식의 작업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으로 고철 자전거를 이용한 대규모 설치 작업을 보여준 강상중, 설치와 행위를 결합한 작업을 보여준 신영성 그리고 오상길, 윤영재 등이 설치 형식의 작업을 선보였다. 2000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며 시퀸과 숯을 이용한 설치작업을 선보였던 노상균과 이영배 그리고 오원배는 표현적이며 강렬한 대형 회화 작품을 출품했다.“(출처 2010년 ‹젊은 모색 十年› 도록)

1987년 2월 28일 청년 작가 전


2003년 5월 21일 곽덕준 작가

현시원

전시장에 곽덕준의 영상 작업이 상영되는 동안 로비에서는 개막식 행사가 열렸다. 조촐한 행사였지만 테이프커팅이 빠질 수는 없었다. 테이프커팅을 하고 난 후 잘린 색색깔의 테이프를 보며 사람들은 꼬불꼬불해진 종이들을 두 손으로 휘날리게 하거나 박수를 쳤다. 좌측에서 두 번째 모니터에 보이는 흰 천은 아마도 ‹DUCK 안의 DUCK›(1997)이라는 작업 같다. 맞다면 10분 동안 상영되는 영상 작업이었다. 10분 동안의 시간 사이즈가 전시가 열리는 시간동안 반복되었다. 이 작품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 작품 디스크립션에 따르면 ‘곽(郭)’과 ‘꽉(오리의 울음소리)’을 연관짓는 작가는 오리와 함께 ‘곽’, ‘꽉’이라고 외친다.



2003년 5월 21일 곽덕준 작가









1986년 8월 17일 전두환

현시원

체육인 전두환에게 미술이란 도무지 낯선 것이었다. 무엇인가 명령을 해야 하는 것인가? 축구공을 뻥 차듯이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등짝이라도 툭 치며 칭찬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두환은 어쨌든 그림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기로 했다.


1986년 8월 17일 전두환
지금은 없는 작가를 위하여:
낯설은 공간 속 짐작 못할 추모와 회고


이나연

     이름없는 아이
소위 말하는 엘리트미술교육(이화여중, 서울예고, 서울대)을 받은 최욱경은 미국유학길에 올라 “새로운 환경에 경탄했고, 막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눈치만 봐야 했고, 신경이 예민해져 적응하느라고 남의 말을 듣는 버릇,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감성이 예민한 작가가 돌연 겪은 공간의 변화. 전혀 다른 외양을 가진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언어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글과 그림이 탄생한다. 최욱경은 이런 변화의 경험을 시의 언어를 빌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아주 먼 옛날 한 때에 나의 이름은 마루 위에서 손 그림자와 놀던 겁 많게 ‹눈 큰 아이›였답니다. 한 때에 나의 이름은 낯.설.은. 얼.굴.들. 중에서 말을 잊어버린 ‹벙어리 아이›였습니다. 타향에서 이별이 가져다 주는 기약 없을 해후의 슬픔을 맛본 채 성난 짐승들의 동물원에서 무지개 꿈을 쫓다가 ‹길 잃은 아이›였습니다. 결국은 생활이란 굴레에서 아주 조그마한 채 이름마저 잃어버린 ‹이름 없는 아이›랍니다. 나의 이름은 ‹이름 없는 아이›랍니다.”

     ‹최욱경›전
1985년 7월 17일 최욱경은 사망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역사는 1986년 8월 25일에 시작된다. 1987년 4월 28일부터 5월 17일까지 약 3주간, 과천관 제2전시실에선 ‹최욱경›전이 열린다. 추모전이자 회고전이었다. 작가의 죽음-미술관의 탄생-전시의 시작이다. 최욱경은 본인이 가본 적도 없고 가볼 수도 없는 공간에서 생전에 상상 못한 회고전을 가진 셈이다. 전시의 기획단계부터 디스플레이와 도록 제작 과정에도 작가가 (의도치 않게) 전혀 관여 못한 전시다. 사후 일 년의 시간차로 과천관의 탄생을 지켜보지도 못했으니 상상 속에서조차 그 공간에 작품을 걸어보는 기회가 없었음은 당연하다.

     보지 못한 전시에 대해 말하기
‘벙어리’이고 ‘길 잃은’ 아이였던 미국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그는 ‘이름 없는’ 아이였다. 최욱경이 “미국에서 연구를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고독하고 내성적인 그가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자기 세계에 골몰해서 주변의 관심에서 초월한 채 살고 싶은 작가에게는 한국의 풍토가 낯.설.면.서.도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전시를 마련한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경성은 회고한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채로 최욱경은 경계에서 예술적 감성의 날을 벼린다. 하지만 살아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듯했던(당시 경쟁자가 없을 법한 최고의 학벌과 경력, 실력을 가지고서도 교수자리를 얻지 못한 시간이 있었다. 너무 서구화된 작가적 태도를 가졌다며 배척당한 시간도 있었다.) 고국은 작가의 죽음에 발빠른 반응을 보인다. 1982년에 태어나 2016년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당연히 1987년에 열린 최욱경의 전시를 보지 못했다. 당시 운 좋게 그 공간에서 그 전시를 봤었다 해도 작품을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존재상태였다. 좀 더 고백하자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찾아간 횟수도 손가락 열개를 사용해 꼽고도 꽤 많은 손가락이 남을만큼 적다. 공교롭게도 전시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 최욱경과 나의 최대 공통점이다. 보지 않은 전시,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대해 말할거리를 찾느라 필사적으로 많은 자료를 찾아 넘겨봤다. 오히려 최욱경과 나는 뉴욕현대미술관을 방문해, 그 공간과 작품에 대해 사유한 시간이 많은 것 같지만, 그조차 뉴욕현대미술관이 리모델링 과정을 겪은 전후의 차이가 있다. 그가 본 뉴욕현대미술관과 내가 본 그곳은 많이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고 “감동이라는 것이 어떤 주의나 운동을 초월해서 그것은 그림과 그것을 보는 관객 사이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어떤 문제를 제시하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느낌 정도는 내게도 전해진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일체의 정적과 사무사의 신비스러움은 마치 성스러운 제단 앞에 무릎을 꿇는 기분이 든다”는 점도 공감 가능하다. 하지만, 최욱경이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보고 어떤 감상을 가질지, 본인의 전시가 열렸던 국립현대미술관 제2전시실에 서서 무슨 사색에 젖었을지 알 수 없다. 답을 내릴 수 없고 막연히 짐작만 하는 아름다운듯 아리송한 추상화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작은 단서를 찾고자 전시기록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봐도, 배경으로 놓인 전시장의 작품들은 확인하기 어렵고, 낯.설.은 얼굴들만이 찍혀 있다. 사진 속에선 그의 작품들이야말로 낯.설.은.얼.굴.들.처.럼.놓였다. 낯.설.은.얼.굴.들.이.기록된 최욱경의 전시. 최욱경도 최욱경의 작품도 없는 ‹최욱경›전의 기록사진들은 낯.설.다. 당시의 공기를 상상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예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80년의 일몰시간
언젠가 신선한 질문을 하는 이를 마주쳤다. “1975년도의 오늘 날씨는 어땠어요?” “30년전 오늘 이 자리엔 누가 살았어요?” “1980년 오늘엔 해가 몇시에 졌지요?” “한달 전의 노을 빛깔은 무슨 색이었어요?”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호기심에 집중하느라 일상생활에 다소 지장이 있던 이를 두고 사회에선 자폐증환자라 말했다. 사회의 분류에 따라 관심이 필요한 존재가 됐던 것이다. 그를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 우연히 만났다. 2시간 남짓 짧은 만남 동안 평생에 기억할 만한 인상 깊은 질문이 수도 없었다. 내뱉는 모든 질문이 시였고, 그래서 내 기억 속 그는 문학천재였다. 그의 질문은 시공간에 대한 인식의 나태함을 뇌 가장 안쪽에서 흔들어줬다. 멋진 책 한 권을 읽고 도끼로 내리찍히는 경험을 하는 것과 비슷한 강도였다. 아주 오래전 잊어버린 순진한 호기심의 원천에서 물이 다시 솟고 미세한 파동이 일렁이는게 느껴졌다. 요원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상상으로 현실이 잠시 멀어졌다.

     나는 세 개의 눈을 가졌다
1966년 제작한 최욱경의 작품 ‹나는 세개의 눈을 가졌다›는 2014년 8월 14일부터 2015년 2월 2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전시의 제목으로 쓰였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예술적 심미안을 추가한 세 개의 눈. 혹은 낯.선. 공간에서 눈이 세개 달린 괴물로 비춰진 듯했던 본인의 모습에 대한 자화상.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전시를 하든 책을 내든 그가 원하는 것은 사실 한 길로 향했다. 바로 이것. “언젠가는, 서로 바쁜 발거름을 멈추고, 미소하면서, 닫혀진 귀를 열고, 서로 귀를 기울여 듣는다면, 동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왜냐하면, 평화와 사랑 그리고 조화된 세상을 우리 모두는 바라기 때문에.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누군가가 들어 주기를 바라는 작은 나의 목소리는 동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고, 의사 교환이 좌절된 외로움과 그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최욱경은 낯.설.은. 존재들에게 지치지 않고 말을 거는 방식으로 그림과 글을 택했다. 그는 사실 세개의 눈을 가졌던 낯.선. 존재가 아니라, 그저 친근하고 상냥한 눈.큰. 아이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
보지 못한 전시를 밀도있게 상상해보자니 새삼 흥미로운 질문을 하던 자폐증환자가 떠올랐다. 그는 물을 것 같다. “1987년 5월의 과천 현대미술관 제 2전시장의 공기는 어땠나요?”

지금은 없는 작가를 위하여:
낯설은 공간 속 짐작 못할 추모와 회고

1995

김송요

천구백구십오년에 나는 과천 인근의 위성도시에 있는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다.

천구백구십오년에 과천 인근의 위성도시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나는 25시개미할인마트나 주택가에 덩그러니 있는 평상, 간혹 이모들이 데려가는 낙안읍성 대신에 서울랜드와 서울대공원, 국립현대미술관에 나들이를 가게 되었다.

천구백구십오년 처음 간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기억은 지금 와선 내 것이라기보다는 엄마의 것이 되었다. 엄마는 그 해에 나를 데리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 그전까지는 시골에서 미술관 문턱도 밟은 적 없이 살았다. 미술관이 뭔지도 몰랐던 것 같다.

천구백구십오년에는 다다익선의 오른쪽으로 상설전시실이 있었는데 지금 그곳은 그때와 반대로 특별전시실이 되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거기에 가서 내가 보고싶은 그림을 보도록 두었다. 천구백구십오년에 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다른 것은 잘 기억나지 않아도 다만 내가 의자에 가만 않아서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산만했다는 것은 떠올릴 수 있건만, 그 상설전시실에선 한 그림 앞에 아주 오랫동안 서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것이 단발머리 소녀가 그려진 그림이었다고 했다.

천구백구십오년에 대한 나의 (사라진) 기억과 엄마의 (흐릿한) 기억은 대통령 선거처럼 오 년마다 한 번씩 회자되었다. 엄마는 언제는 그 그림이 르누아르풍이었다고 했고 언제는 아주 소박하고 단출하다고도 했으며 언제는 거의 한두 시간을 서 있었다고 했다가 언제는 약간 조금 다섯 살치고는 길게 서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천구백구십오년에 상설전시실에서 본 그림이라는 것이며 엄마는 언제고 박래현의 ‹노점› 앞에 서면 그 말을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항상 ‹노점›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고 때로는 뛰어난 작가를 소개할 때 누군가의 아내로 얼마나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오 년 전까지는 오 년마다 꼬박 천구백구십오년에 내가 본 소녀 초상화가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해서 끄집어지지도 않는 기억을 뒤척였다. 요즘은 천구백구십오년에 시골에 살던 다섯 살짜리 딸과 과천 인근의 위성도시로 이사하여 주말에 종종 국립현대미술관에 ‹노점›을 보러 갔던 스물여덟 살의 여자를 생각한다. 보드라운 화선지에 까슬까슬한 색으로 그려진 여자들을 보고 서 있었을, 천구백구십오년에 스물여덟 살이었던 우리 엄마.

1995



필자는 2001년 중 일정 기간 청소년 도슨트 자원봉사를 했다. 또한 2015년부터 전시평가위원을 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원형전시장에서 열린 ‹조성묵›전을 평가했다. 도슨트를 위해 직접 쓰고 그렸던 스크립트와 작품 배치도를 통해 기억을 되살려 원형전시실의 상설전을 중심으로 15년 전의 전시를 평가해 본다. 이 글은 조사와 어미 외에 당시의 도슨트 관련 자료들과 그 밖에 같은 해 대학교 미술관학 수업의 자료들과 과제, 그리고 최근의 전시평가서의 기입된 단어로만 작성된 것이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미술관

윤원화

2005년 6월 9일 오후 3시 국립현대미술관 중앙홀에서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미술관›의 전시 개막식이 열렸다. 이 행사의 기록 사진은 모두 필름으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셔터를 누르는 손은 아마도 지금보다 좀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남아있는 사진들은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기록하지 않을지에 대한 당시의 기준을 보여준다. 사물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미술관이 모든 사물들의 집이 되지는 않듯이 미술관의 기록 사진도 모든 사람들을 포착하지는 않는다. 사진은 중요한 사람들 또는 귀중한 손님들의 행차를 따라간다. 요인들과 귀빈들, 하지만 적어도 사진 속에서 그들은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변덕스러운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정해진 동선을 따라 걸어가면서 정해진 위치에서 사진으로 기록되어야 할 배치와 제스처를 실연한다. 궁중 사극에서 볼 법한, 각각의 개체들에 우선하는 어떤 예법이 사진의 연쇄를 지배한다. 이것이 21세기하고도 5년이나 지난, 지금으로부터 10여 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 시점의 기록임을 생각하면, 탄식과 경탄이 뒤섞인 채 질문하게 된다.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이것은 당시 전시의 주제이기도 했다.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새로운 세기, 새로운 미술관›은 1990년대의 주요 미술관 건축을 개괄하면서, 세기 전환기에 이르러 미술관을 짓는다는 행위에 어떤 요구와 기대들이 투영되었으며 그것이 실제 건축으로 어떻게 응축되었는지 살피는 전시였다. 1990년대 후반 스위스 바젤아트센터가 기획한 이 전시는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지구를 천천히 돌아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이탈리아, 미국, 브라질, 멕시코, 일본의 17개 미술관을 순회한 끝에 마지막으로 한국에 왔다. 전시는 실현되지 않은 계획안을 포함하여 25개 미술관을 소개했는데, 미국 8개, 독일 5개, 스페인 3개, 프랑스 2개, 그 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웨덴, 스위스, 영국, 포르투갈, 멕시코의 미술관이 각각 1개씩 포함되었다. 이 시공간의 풍경은 만국기처럼 다채롭지만 지리적으로 편향되어 있고, 그럼에도 지난 세기의 중심들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만 해도 미술관은 소수의 국제적인 대도시에서만 성립 가능한 특권적인 기관이었다. 그러나 지난 반 세기 동안 대도시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미술관도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양적인 증가는 자연스럽게 질적인 변이를 불러왔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미술관›을 기획한 중부유럽의 건축학자들은 미술관의 이 같은 변화를 공식적인 건축의 역사로 수렴시키려고 시도했다. 1999년 전시와 연계하여 발간된 동명의 책에 따르면, 그것은 1970-80년대에 파리 퐁피두센터와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관이 보여준 충격적인 혁신의 산물이며,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1943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실현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대담하고 표현적인 미술관 건축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미술관 건축은 결국 건축이며 심지어 특권적인 건축이다. “미술관은 모든 건물의 지도자다.” 전시 기획자 비토리오 마냐고 람푸냐니는 이렇게 쓴다. 그것은 “건축 이념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실현되고, 오늘날의 모든 중요한 건축 경향이 가장 독창적이고 급진적으로 구현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이 같은 특권적 건축의 승리는 그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변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학습의 기능을 담당하는 예술의 개념과 대립되는, 이른바 예술을 오락으로 평가하는 사회 … 반드시 팔려야 하는 예술이라는 개념”에 부응한다.



람푸냐니는 이 같은 시대 변화 속에서 건축의 위상과 과제를 다소 오만하게 기술한다. “건축의 최대 약점은 건축의 목소리가 크건 작건 건축 자신이 수용하는 예술작품의 힘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 하지만 여전히 예술은 계몽과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소규모 집단이 존재한다. 이 집단을 위한 미술관 건축 역시 존재해야 한다.” 이 발언에는 강자에게만 허락된 어떤 관대함이 있다. 그리고 이를 건축적으로 가장 우아하게 표현한 사례는 아마도 영어와 독일어로 발행된 1999년 초판의 표지에 등장하는 오스발트 마티아스 웅어스의 함부르크 미술관 현대미술 갤러리일 것이다. 여기서 건축은 자진해서 수호자와 구도자 사이의 겸손하고도 당당한 위치에 선다. 건축사가 울리히 막시밀리안 슈만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하늘에서, 그리고 예술의 앞뒤에서 불어오는 것은 계몽의 바람이다. 이곳 갤러리는 미술유파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인류를 위한 감정이 교류하는 장소이며 이제 그러한 교류의 최고의 표현과 희망은 예술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계몽의 역사를 이어 쓰는 현대의 대성당을 꿈꾼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또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그것은 패배의 역사 또는 거듭되는 수복의 역사다. 이를테면 19세기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이미 15세기에 인쇄술의 발명으로 성서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사회를 떠받치는 시각적이고 총체적인 상징으로서 건축의 표현적 권능이 퇴색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위고의 논평은 차라리 표현적 매체로서 또는 넓은 의미의 미디어로서 건축이 겪어 온 오랜 경쟁의 역사를 입증하는 단편적 증거에 가까울 것이다. “건축 이외의 여러 가지 시각적 환경이 점점 더 경쟁적으로 보는 이의 관심을 갈취하고 있었다.” 건축사가 펠리시티 스코트는 이렇게 쓴다. “1950년대에 이르면, 도시의 간판들은 … 현대 건축의 가독성을 압도했다.” 이 같은 경쟁의 압박 속에서 대성당은 일종의 잃어버린 낙원이 되어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그것은 빛에 헌신하는 동시에 스스로 빛이 된다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영광의 건축이다. 또한 그것은 “미술관은 모든 건물의 지도자”라고 말하게 만드는 정념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지난 세기 후반 미술관의 범람은 현대 건축이 대성당의 꿈을 되살릴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기회를 제공했다.



대중의 관심과 사회적 영향력을 재탈환하여 다른 미디어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1990년대 미술관 건축의 가장 성공적이고 상징적인 사례는 물론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일 것이다. 2005년 한국 전시와 함께 발간된 한국어판 ‹세계의 미술관: 새로운 세기 새로운 미술관›은 정사각형의 질서로 규율되어 하얗게 빛나는 하늘을 향해 상승하는 웅어스의 중앙 홀 사진을 책날개로 밀어내고, 그 대신 꿈틀거리는 중앙 홀로부터 번쩍이는 곡면들이 쏟아져 나와 컴퓨터 배경 화면 같은 구름 무늬의 새파란 하늘을 반사하는 게리의 “서커스 천막” 외부 전경 사진을 표지로 내세웠다. 또한 이 거대한 미술관의 모형은 귀빈들의 동선을 따라 촬영된 2005년 ‹새로운 세기 새로운 미술관›의 전시 개막식 기록 사진에 가장 빈번하게 포착된 사물이기도 했다. 미술관 기록 사진이 사물에 대해 보이는 일관된 무관심을 감안하면, 이는 귀빈들이 이 모형 앞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진 속에서 그들은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건축사가 커트 포스터는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17세기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바로크 건축과 비교한다. “형상은 결여되었으나 강렬한 육체적 성질을 보유한” 게리의 건축은 확실히 고전적 형태를 회피하는 보로미니의 구불구불한 곡선들, 이를테면 로마의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할 만하다. 그러나 보로미니의 대성당은 산업혁명 이후 다양한 유파의 낭만적 인간들이 그리워하던 상상 속의 중세 고딕 대성당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종교개혁과 신대륙 발견 이후 17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도 유일하고 절대적인 질서를 보장하지 못했다. 그것은 유럽을 포함한 작고 친숙한 세계와 유럽 바깥에서 새로 발견된 기이하고 거대한 세계 양쪽 모두에서 전력을 다해 싸워야 했다. 그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의 성상파괴주의에 맞서 시각적인 것의 권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보로미니가 경쟁자였던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와 나누어 설계한 포교성성 청사는 바로크 건축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설립한 포교성성은 이름 그대로 신앙의 선전과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전 지구적 기관이었다. 이 건물에서 나타나는 보로미니 특유의 구불구불한 곡선은 하늘 높은 곳이 아니라 파도를 헤치며 옆으로 옆으로 나아가는 배의 물보라처럼 보인다.



대성당과 포교성성이라는 두 개의 형상은 미술관의 변화, 이를테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이르는 반 세기 동안의 변화를 압축한다. 또한 그것은 국가가 운영하는 민족문화의 전당이자 일종의 특권적인 개항지로서 이중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지난 역사와도 맞닿는 면이 있다. 1980년대에 과천에 부지를 마련하고 처음으로 미술관 전용 건물을 신축할 때부터, 그것은 “21세기에 새로이 부각되는 문화적인 요구에 부응하면서 그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5년 당시 김윤수 관장이 이 말을 ‹새로운 세기 새로운 미술관›의 인사말로 썼을 때 그 의미는 좀 더 특별했을 것이다. 국가의 울타리 속에서 국가기관이 독점적으로 사회 전 분야를 선도하고 가장 큰 건물을 봉헌받던 시대는 끝난 듯이 보였다.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어디론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질문이기 이전에 명령에 가까웠다. 미술관은 더 이상 국가가 공인한 독점적인 개항지가 아니라 수많은 배들 중 하나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도 미술관이 꿈꾸었던 것은 이동식 항구로서의 배, “문화의 항공모함”과 같은 무언가였을 것이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구체적으로 서울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고, 전시 부대 행사로 2005년 6월 24일 개최한 학술 발표회 ‹새로운 문화 메카로서 미술관의 역할›에서 이 의제를 다루었다. 그러한 모색의 결과는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돌아오게 되겠지만, 아직까지 그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로 남아 있었다.




참고문헌
비토리오 마냐고 람푸냐니 외, 『세계의 미술관: 새로운 세기 새로운 미술관』, 양효실, 최도빈 옮김, 한길사, 2005.
Felicity D. Scott, Disorientation: Bernard Rudofsky in the Empire of Signs, Berlin: Sternberg Press, 2016.

새로운 세기 새로운 미술관


2008

김송요

이천팔년에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빌 비올라의 영상을 봤다. ‹빌 비올라: 해변 없는 바다› 전시는 원형전시실에서 다섯 달 동안이나 이어졌다. 아주 어두운 전시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세 개의 스크린을 봤다.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귀를 막고도 보고 실눈으로도 봤다.

이천팔년에 나는 전시실 맨바닥에 다리를 접고 앉아서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갑자기 죽는 게 무서워서 울었다. 여전히 나는 전시실에서 좋아하는 것을 실컷 보거나 듣거나 만진 다음에 전시실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음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훌쩍훌쩍 운다.

지금 생각나서 ‹해변 없는 바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해당 도메인은 '남국으로 현실 도피' 사이트로 바뀌어 있었다.

2008



구동희
미술작가 —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거주, 생활기반의 영상 및 입체 설치 작업을 한다. TV 시청과 편의점 왕래를 즐기고 잡다한 사건, 사물, 공간들을 주로 찾아본다. 201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 참가하면서 과천은 지리적으로 수도권이지만 활동반경이 극히 좁은 나에겐 심리적으로 공기좋은 강원도 정도라고 생각한다.


케케묵은 표현이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박가희

1986년부터 2005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첩에는 마치 반복되는 역사처럼 얼굴만 갈아 끼운 듯 비슷한 배경과 옷차림을 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거의 무명처럼 보이는 인물들 가운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커팅식’과 ‘악수’라는 제스처를 빵조각 삼아 거대서사가 낸 ‘길’을 추적해본다. ‘국립’이라는 단어가 부여하는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부합하는 이 사진들을 토대로,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역사적인 개관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을 재구성해본다. 행위의 세 주체자들을 중심으로 건립 당시의 정황과, 각자의 위치에서 이 건물에 투여했을 각기 다른 희망을 상상해본다. 앞으로 등장할 이미지와 조각 글은 조응하며 신문 기사와 보도사진처럼 당시를 기록하고 묘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지시된 시간과 인물이 이미지와 정확히 상응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서로 어긋나 있다. 이는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 속에서 주어와 시제만 바꿔도 결국 상상이 현실에 닿는 듯한 기시감을 주기 때문이다.



# 1986년 8월 25일, 개관 커팅식에서

테이프를 손에 쥐고, 커팅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문뜩 그날이 떠올랐다.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계 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정확히 1980년 10월 26일, 그날 제29회 국전 개막식 행사가 열렸다. 9시 30분경 덕수궁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한 ‘그’는 여러 수장들과 악수를 나눈 뒤 개막식 테이프를 끊고 약 40분 동안 전시를 관람했다. 전시를 돌며 ‘그’는 수상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격려했다. 참석한 작가들은 ‘그’에게 야외 전시장이 필요하다고 건의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문공부 장관에게 이를 검토해 달라고 지시했다. 약 두 달 후 ‘중기재정계획서’에 미술관 건립 안이 제출되었다. 바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청사진이었다.

그날부터 오늘 국립현대미술관의 개관 커팅식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연일 터지는 집단들의 행동, 불안정한 남북 관계, 비행기 폭발사고 등 큰 일을 앞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그’에게 복잡 다난한 상황을 타계할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과 같은 굵직한 국가적 이벤트와 함께 “제5공화국 국정지표”에 “교육현신과 문화창달”을 실현해 줄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립을 지시했다. 마침 ‘그’가 해외 순방 중에 둘러본 해외 미술관들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 찰나에 먼저 푸념 아닌 좋은 제안이 들어왔고, “국민 모두의 문화의식을 높여 주고 문화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추도록 하는 국민 교육장”으로서의 국가 최고의 미술관 건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노력의 성과가 오늘 결실을 본다.

가윗날 위에 테이프를 올려두고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프를 응시하자니, 모든 것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생각도 잠시 사회자의 멘트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그’는 이내 시원하게 테이프를 잘라냈다.

싹. 뚝.

— “전 대통령, 국전 개막 테이프 끊어 야외전시장 검토하도록”, 경향신문, 1980.10.2
—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한국일보, 1986. 8. 26
—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프로젝트 ‹기억의 공존›, 2016, 건축 연표 참고



# 1986년 8월 25일, 개관식을 마치고

82년 가을 즈음 ‘그’는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국에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위하여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미술관을 새롭게 건립하기로 했으며, 이를 위한 현상 설계에 참여할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한국을 떠나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땅한 때를 찾지 못해 미국에 남아 일을 하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반가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그’는 미술관 설계는커녕 한국에서 삽도 떠본 일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제안이 들어온 것도 놀라웠지만, 당시 한국의 굵직한 공공건축은 거의 다 맡아서 설계하고 있던 김수근 선생과의 경합 끝에 ‘그’의 설계안이 최종 선정된 것 또한 매우 이례적인 결정처럼 보였다. 새로운 얼굴을 원했던 심사위원들의 의중도 있었지만, 1만여 평을 설계한 ‘그’의 시안은 김수근 선생의 그것이 비교적 ‘아담’했던 것에 비해 매우 웅장하고, 권위적인 시안으로 여타 해외 미술관과 견주어도 그 위상이 뒤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 것 같다. 시안이 선정되고 난 후 건립되기까지 여러 가지 마찰과 갑작스러운 예산 삭감 등 난항 속에서도 결국 오늘이 왔다.

개관식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한 번 함께 일했던 이들과 미술관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그’에게 이경성 관장이 다가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주어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머쓱하게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며 ‘그’는 “왠지 늘 고국에 빚을 진 듯, 마음 한쪽이 불편했는데, 이렇게 빚을 청산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다”라고 겸연쩍게 말했다. 덧붙여 “일반적으로 대규모 공공건물을 지을 때는 정부나 관계 당국자가 설계에 지나치게 관여, 건축설계자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이번 미술관 건축에는 설계에 관한 한 모든 권한을 줘 마음껏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 “「문화」에도 졸라매는 허리띠 현대미술관 건립 난항”, 동아일보, 1983. 9. 12
— “과천 새 국립현대미술관 설계자 김태수 씨”, 동아일보, 1986. 8. 27
—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시공사, 1998
— 김태수, 「국립현대미술관 설계과정을 기억하여 본다」, 2006



# 1986년 8월 25일, 개관식 중

악수를 청하며 다가오는 이가 ‘그’에게 던진 질문은 매우 날카로웠다.
“이 커다란 건물을 어떻게 채울 생각입니까?”
“어떤 논리와 배경에서 미술관 건립이 추진되었건 국립현대미술관 본연의 임무에 부합하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으로 키워갈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대여전을 줄이고 기획전과 상설전을 확대할 겁니다. 협회나 조직 등이 자신의 영향력을 앞세워 전관을 차지하고 벌이는 단체전이나 그룹전은 최소화할 거예요. 또, 미술관이라는 것, 그 정체성은 소장품에서 나오잖아요.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보여줄 좋은 소장품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해외 유수 기관들과의 소장품 교류를 통해 국제 미술을 소개하고, 우리 미술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려고 해요.”
말을 마치며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문공부 장관에게 몸을 돌려 푸념 섞인, 그렇지만 강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예년보다 줄어든 소장품 예산을 회복하고, 전문성을 갖춘 학예직을 늘리는 것이 급선무다”, “미술계의 소원이니 잘 부탁한다”며 재차 강조했다.

어딘지 익숙한 대화다.

— ““세계적 전시관 만들겠다” 재취임한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경성씨”, 경향신문, 1986.7.30
— “국립 현대미술관장 이경성 씨(1919년 2월 27일생) 원고 쓸 시간조차 없이 분주한 나날”, 경향신문, 1982.2.27
— “대담/국립현대미술관 전°새 관장 이경성°임영방씨 학예직 중심 직제개편 제1과제”, 한겨레, 1992.5.29
—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시공사, 1998

참고문헌
양은희, 「기억, 욕망 그리고 스펙터클: 국립현대미술관 만들기」, 2007.
목수현, 「한국근현대미술사에서 제도에 관한 연구의 검토 」, 2012.

케케묵은 표현이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1987년 1월 19일 - 24일 청소년 미술강좌

현시원

보낸사람: 000 <-------@naver.com>
받는사람 : -------@hanmail.net
날짜: 2014년 8월 17일 일요일, 23시 23분 21초 +0900
제목: <MMCA 미술비평워크숍>을 듣고

안녕하세요. XX고등학교에 다니는 000 입니다. 과천 미술관에서 했던 미술비평워크숍을 들었습니다. 쌤이 하신 수업도 들었구요. 첫 시간에 말씀하신 내용을 인상깊게 들어서 바로 질문을 드렸던 게 생각나네요. 사실 그날 수업을 집에서 곱씹어보면서도, 비평문을 쓰는 시간에서도 질문이 생겨서 모아두었어요. 마지막 차시 때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오지 않으셔서 아쉬웠어요..ㅠ 그래서 가능한대로 메일 주소를 찾아서, 수업을 잘 배웠다는 말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말도 같이 남기려고 해요. 먼저, 예술이라는 단어로 막연하게 진로를 출발하려고 했던 저에게 수업의 내용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떤 예술을 하더라도 주변의 것들(사물)을 잘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대)미술가는 주변의 물건들을 잘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사물성을 요리조리 돌려보면서 발견한 것을 전시장에 위에 끌어올리는 사람이라는 생각, 그래서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쪽 분야로 밀고 나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많은 질문과 그에 달린 조그만 답들을 얻었지만, 아직 질문으로써만 남은 문장들이 저에게는 남아있어요. 같이 얘기를 나누었다면 제일 좋았겠지만... 전자 상으로나마 질문들을 보내드리니 답을 해주시면 무척 감사할거예요. 제 정리된 비평문을 함께 보내드릴테니 제가 어떤 식으로 더 배우면 좋을지도 말씀해주시면 더 좋을거같아요. 그리고 혹시...! 바쁜 시간을 내주신다면 교육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사물과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해요. 제 인턴쉽 활동에도, 제 진로에도 큰 도움이 될거 같아요. 가능하다면 참 좋겠습니다. 워크샵이 12시간이라는 숫자로 남았지만, 제 방학에서 제일 두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릴게요. 잘 배웠고 감사합니다ㅎㅎㅎ


1987년 1월 19일 - 24일 청소년 미술강좌


1999

김송요

천구백구십구년에 우리 가족은 문원동에 사는 친구 가족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엘 가곤 했다. 문원동의 단독주택 단지에서 미술관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었는데, 미술관까지 걸어가는 우거진 오솔길을 통과하고 나면 인도라고 부르기 어려운 갓길이 있는 좁은 도로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리프트 내리는 곳이, 거기서 꺾어 올라가면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조각공원 후문이 나왔다.

천구백구십구년에 문원동에 사는 친구 가족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갈 때마다 도시락을 싸곤 했다. 그 도시락은 찬합에 든 한입거리의 음식이 아니라 전기밥솥에서 꺼낸 밥통과 구운김 그리고 깻잎장아찌였다. 나는 사람이 전기밥솥에서 밥통을 꺼내서 그걸 바깥에 들고 나간다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천구백구십구년에 두 가족은 조각공원 잔디밭에 앉아서, 전기밥솥에서 분리된 채로 문원동에서 막계동까지 이동하느라 식은 밥이 되어 가는 밥을 먹으면서 ‹노래하는 사람›을 보곤 했다. 나는 ‹노래하는 사람›을 보면서 평화로움과 동시에 지구종말의 위기를 느꼈다. 천구백구십구년에 나는 클램프의 ‹X›나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를 보고 너무 깊은 감흥을 얻었고 뉴스도 열심히 봐서 너무 언론을 믿었고 ‹토요미스테리극장›의 열렬한 시청자로서 너무 상상력을 길러서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멸망의 날과 그날 인류가 생존한다면 찾아올 Y2K의 위기를 진심으로 두려워했다.

천구백구십구년이나 그전 IMF때나 초등학생인 내 인생은 별다른 차이라곤 없이 흐르곤 했다. 가난하고 어린 나는 막연한 불안의 정서만을 배워서 국립현대미술관 조각공원 잔디밭에서 삐그덕거리는 턱관절로 노래를 부르는 선지자의 유선형 척추를 보며 그가 루르드의 성모상처럼 어떤 징후를 내보이길 기다렸다.

천구백구십구년, 세상은 용케 망하지 않았고 컴퓨터는 1999 다음이 2000인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위기를 모면하여 이듬해 나는 새천년을 맞이했다. 나는 세상이 망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내심 세상이 망하기를 기대하기도 했던 것 같다. 2012년에도 같은 생각을 했고 그때는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이 산다는 동네에 가서 멸망을 기다렸다. 예언은 또다시 틀렸고 그들 모두 여전히 노래를 부른다.

1999






















박가희
동시대미술의 지식생산의 가능성을 믿고, 전시라는 매체를 통해 그 가능성을 실천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일하고 있으며, 2016년초 동료 기획자 전효경, 조은비와 함께 『스스로 조직하기(self-organised』(미디어버스, 2016)를 번역했다.


윤원화
저술가, 번역가. 『청취의 과거』, 『광학적 미디어』, 『기록시스템 1800/1900』 등을 번역했다. 2012년부터 미술과 시각문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여 《건축신문》, 《아트인 컬처》, 《도미노》 등의 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2014년 일민미술관에서 아카이브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를 공동 기획했다. 2016년 워크룸 프레스에서 첫 저서인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을 출간할 예정이다.
현시원
큐레이터. 2013년 11월 서울에 안인용과 전시 공간 ‘시청각(audiovisualpavilion.org)’을 열어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 『사물유람』(2014) 등이 있다. 2016년 여름 WRITING BAND 덕분에 과천에 자주 갔고 시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이나연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다. 서울과 뉴욕에서도 살았지만, 제주가 최고라 생각한다. 다만, 미술평론을 전공했는데 평을 할 전시가 없다는 것이 제주의 최대 약점. 없다면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1986년 10월 27일 미술 실기대회

현시원

1986년 10월 27일, 섭씨 18도의 날이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미술실기대회가 열렸고 500 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학생들은 그림을 그리려고 흰 도화지 앞에 앉거나 섰다. 1986년 11월 3일 심사가 있었다. 실기대회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자신들의 그림이 바닥에 놓여 지팡이를 쥔 심사위원들이 하나하나 지휘봉으로 가리키며 심사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 했다. 학생 중 한 명은 대상을 탔다. 바닥에 있던 그림이 위로 일으켜 세워지면서 화판에 올라왔던 순간이 있었다. 그림을 그린 학생은 자신의 그림들이 최소한 5분 이상은 누군가에 의해 관람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심사위원들이 그림을 보는 데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붓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원근법과 빛의 강도는 어떻게 숙련된 기술에 의해 완성된 이 그림으로 옮겨져 왔는지 심사위원들은 미술 실기대회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을, 최적의 그림을 대상으로 정했다. 그리고 금상 은상 동상, 그리고 빼먹어서는 안 되는 장려상으로 지명했다.




1986년 10월 27일 미술 실기대회
1987년 2월 클로드 라이어리 방문

현시원

참조코드: IT/1980PH/0016
생산연도: 1987
유형: 시청각자료/사진
생산자: 국립현대미술관
원본열람여부: 가능(디지털 : 과천관 소재) 범위와 내용: 1987년 2월 클로드 라이어리가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필름첩이다. 사진 4장, 필름 13컷으로 구성되어 있다.
키워드: 1987,클로드 라이어리

«별들의 미립자 제막식» 사진필름첩
참조코드: IC/1980PH/0007
생산연도: 1987
유형: 시청각자료/사진
생산자: 국립현대미술관
원본열람여부: 가능(원본 : 과천관 소재)
범위와 내용: 1987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클로드 라이어리의 ‹별들의 미립자›의 작품 설치과정 및 제막식을 촬영한 사진 및 필름으로 구성된 사진필름첩이다. 사진 38장, 필름 63컷으로 이루어져 있다.
키워드: 클로드 라이어리, 별들의 미립자, 조각공원, 제막식, 1987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연구센터 아카이브에서 클로드 라이어리의 자료는 2건이 검색된다. 클로드 라이어리가 1987년 이제 막 문을 연 대한민국의 한 국립 미술관을 찾았다는 것, 그가 한복을 입은 두 여인의 환영을 비롯하여 젊은 미술사학자, 관장을 비롯한 미술관 관계자들의 열렬한 호의를 받았다는 것. 알 수 없는 설렘에 도취된 과천의 시공간과 무관하게, 자신의 작업 설치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표정의 클로드 라이어리를 사진 속에서 바라본다.

클로드 라이어리는 벨기에 태생의 작가로 2007년 사망했다. 한국어로 구글 위 단어를 입력하여 ‘클로드 라이어리’를 향해 한발자국 더 나아가려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입구가 미술연구센터의 ‘클로드 라이어리’라면 출구 또한 다시 여기로 빙빙 돌아온다. 그러니까 모국어로 검색할 수 있는 클로드 라이어리는 딱 이 두 자료 뿐이다. <별들의 미립자>라는 작품을 설치하는 1987년 4월의 클로드 라이어리는 2007년 세상을 떠났다.

Claude Rahir, 클로드 라이어리.

클로드 라이어리의 홈페이지로 들어간다. 불어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서울이 마치 환상 속 먼 나라인 것처럼 기능한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자메이카, 일본 등에 설치된 그의 또 다른 작업 사진과 더불어 1987년 4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인스톨레이션 뷰가 올라와 있다. 그는 모자이크 벽화 작업을 주로 했고 세계 평화라든지 연합이라든지 공동체라든지, 또는 그 작고 낯선 나라의 꼬마들을 사랑한다고 밝힌다. 왜인지 알 수 없으나 과천에서 찍은 이 사진은 모두 흑백 처리되어 있다. 홈페이지의 또 다른 웹 페이지에는 한복을 입은 여인이 수채물감으로 그려 있는가 하면, 한복 입은 동자를 안은 젊은 엄마의 그림도 그려져 있다. 마치 1950-60년대 박고석이나 이봉상, 김용주가 그린 그림 속의 앉은 여인들처럼. 클로드 라이어리는 한복입고 꽃을 건네주는 여인을 보며 혹시 대한민국이 아직 한복과 양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시기였다고 착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적어도 클로드 라이어리의 웹사이트 안에서 이 대지미술가 또는 설치를 주요 매체로 하는 작가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길고 긴 편지를 주고 받은 아직은 미지의 동산처럼 여겨지는 나라로 남아있다. 2015년 주벨기에 대사관에서는 클로드 라이어리의 전시가 열렸다. ‹별들의 미립자›, 그리고 클로드 라이어리에 대한 글은 많지 않다. 1993년 7, 8월에 발행된 미술관 소식지에 실린 박래경 당시 학예연구사의 아래 글 정도인 것 같다.



“전시장내에 놓이게 되는 조각이 급기야 밖으로 나가 개방공간에 설치됨으로써 우리는 이런 경우를 소위 야외조각과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말에는 실내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조형물을 보게 되는 관자의 작품에 대한 시점에서 벗어나서 위로는 하늘 밑으로는 땅이라는 대자연의 관계 내에서 무한방위의 가능 속에 위치하는 자리매김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그것은 또 어떤 뜻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의 공간이면서 또한 보는 관 자의 공간으로서 정말 새로운 의미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관계 속에 새로 부여된 변화된 조형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복합공간성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야외조각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설치된 작품들 속에서는 그야말로 야외조각 작품 성격에 그럴싸한 작품세계들 이 눈에 띤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늘을 향한 예술가들의 꿈과 상상력의 표현에서 특히 그러하다. 하늘을 향해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염원을 종교적으로 조형적으로 풀어나간 옛날 사람들처럼, 오늘의 조형예술가들은 시적, 과학기술적, 조형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늘을 향한 현대인간의 꿈을 각자나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벨기에 작가 끌로드 라이르(Claude Rahir)의 (별들의 미립자)(1987)에서는 돌, 자갈 등을 사용한 모자이크 방식으로 은하수를 땅위에 재현하였고 미국작가 탈 스트리터(Tal Streeter)는 그의 (용의 계단)(1987)에서 하늘에 대한 무한한 꿈을 명확, 간결한 수직구조물의 기본형태로서 제시하고 있다. 한편 독일작가 헤르만 클라인크네히트(Hermann Kleinknecht)는 높이 7미터의 원추형 스데인레스스틸로서 우주공간을 향한 최소한도의 지시물로서 그의 (무제)(1991)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중략)“








1987년 2월 클로드 라이어리 방문















11dot2
큐레이터, 미술사 박사과정 학생. 동아시아 도시환경의 정치,사회, 문화적 변화에 반응하여 새로운 시각적 인터페이스로 작동하는 매체작업들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14

김송요

8월 23일 토요일 10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소강당에서 축제 참여를 위한 교육을 받았다. ‘2014 막계페스티벌 서포터즈 아트크루’ 활동을 위한 교육이었다. 이후 강당에서 올라와서 올해의작가상을 보았다. 한번은 다같이, 한번은 혼자 보았다. 교육팀에서 나눠준 천 방석을 깔고 앉아 설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이곳에서 전시해설을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듣고 나서는 함께 이동할 땐 하지 못했던 긴 영상 보기나 ‹재생길› 걷기를 했다. 장지아 작가의 영상에서 친구가 나왔다. '레지스탕스'라고 써 있는 옷을 입고 입에서 입으로 카라멜 같은 것을 넘겨 주고 있었다.

축제는 9월 20일부터 9월 21일까지 열렸다. 나는 야외에서 종이모자를 나눠 주고 참여형 프로그램을 알려주고 이건용 작가의 퍼포먼스를 사람들이 재밌게 보는지 어린이들이 네임리스건축의 짚단 위에서 놀다가 넘어지지는 않는지 누군가 밟으면 안 되는 옥외조형물과 밟으라고 둔 옥외조형물을 헷갈려서 세차게 발을 구르지는 않는지 보았다. 더위에 저만치서부터 팔을 뻗으며 종이모자를 받으러 오는 이들을 보면서 전시실만 나선형인 것이 아니라 조각공원을 둘러싼 길도 빙 두른 곡선의 경사진 길임을 처음 알았다. 쉬는 시간에는 더위와 오르막길을 피해 코너에 차려진 출판사 부스에 갔다. 저는 무슨 책을 살까요? 물어보자 이 책을 사세요. 저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제 생각보다 우울하다는 것은 처음 알았어요. 하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 장 자끄 상뻬에 대한 책을 샀다.

저녁 무렵이 되자 정수기에서는 시원한 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같이 일하던 언니 하나가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이 분명해야 해.” 하고 말했다. 그래야 연애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갑자기 왜 연애를? 아직도 이유는 모른다.

2014






최하늘
서울에서 조금씩 작업을 전개 중인 초년작가.
입체 매체를 주로 다루며 간헐적으로 만화를 그린다.
현재 차슬아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사장님의 지시를 받아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2002년 12월 17일 신수장고 준공식

현시원

2002년 12월 17일 오전 11시 정각 신수장고 준공식이 열렸다. 준공식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100여 명이었다. 준공식은 2시간 동안 열렸다. 식순은 다음과 같았다. 입구에서 계단과 지하 통로를 거쳐 신수장고 앞으로 모두 들어간 후에 주변을 둘러보는 사진을 찍는 것. 다시 지상으로 나와 기공식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축하멘트를 준비한 사람은 두 명이었다. 준공식을 시행하기 위해서 모두 다 같이 신수장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텅 빈 건물이었다.



걸어 들어갔을 때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작품이 수장되어 있지 않은 수장고는 청결했다. 텅 빈 수장고를 보러 간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이 순간이 의아했다.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곳을 보러 갔는데 벽이 보이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의 어깨가 보였다. 대통령 취임식에 왔을 때 대통령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참가한 사람들의 뒤통수만 보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2002년 12월 19일은 16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2011년 1월 25일에는 200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를 통해 완성된 신수장고가 열렸다. 보도자료를 통해 안내된 신수장고는 2002년에 신수장고라고 불렸던 수장고를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당시 일간지 기사들이 공통적으로 반복하는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1986년 지어진 기존 6개 수장고에 총사업비 84억 원을 투입 ▲ 미술품의 안전한 관리를 위한 ‘항온ㆍ항습 자동화 기능 ▲ 4중 보안시스템으로 방범기능 강화 ▲ 방충ㆍ방습을 위해 너도밤나무, 선반은 삼나무와 오동나무 등의 친환경 바닥 소재 ▲ 육중한 철문은 1,000℃의 화염도 견딤. ▲ 내부 온도 20±4℃, 습도 40~70%를 기준으로 21℃, 50% 대로 유지

2009년에는 리모델링 중인 수장고가 외부에 잠시 공개되었다. 임종업 기자였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1층. 겸재의 1721년작 ‹도산서원›을 비롯해 한국 미술사의 대표작 6412점을 보관하고 있는 미술관 수장고가 20일 ‹한겨레›에 단독 공개됐다. 외부 공개는 1986년 신축 개관 이래 처음이다. 수장고 안에 발을 딛자마자 적외선 감시카메라가 작동했다. 카메라는 곳곳에 설치돼 사각지대는 없다. 찍힌 영상은 중앙통제실에서 24시간 녹화 감시된다. 소장품들은 군 내무반처럼 갈래별로 보관돼 있었다. 내부 온도는 20±2℃, 습도는 55±5%. 작품 보존을 위한 최적 상태다. 제7~제9수장고만 가동중. 구형 제1~6수장고는 리모델링을 위해 비워두었다.”(2009.4.22. 한겨레)




2002년 12월 17일 신수장고 준공식


저작권 협의 중

구동희

2005년 이 호텔에 체크인을 한 후, 벌써 11년이 흘렀다. 나는 프랑스에서 매일같이 회전목마를 타다가 원심력에 튕기듯 뉴욕을 거쳐 호사스러운 비행을 한 후, 인천공항을 거쳐 오래된 친구 드미트리 페트로프 Dmitri Petrov와 함께 이곳에 투숙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본인의 업무를 마무리한 그해에 체크아웃을 하고 나를 두고 떠났다. 이듬해인 2006년 초에는 많은 사람들을 잠시 접견하기도 하였고 나는 이 나라 전체를 만나보고 싶어 조금 고가의 장기 풀-패키지 여행권이 포함된 호텔 투숙 비용을 한꺼번에 지불하였지만, 호텔과 패키지 여행사와의 계약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고, 나름 숲 속 외딴 이 곳에 가장 고가인 디럭스 방을 내준다는 말에 혹하여 일단은 머무르게 되었다.

한때 숙소 인근 경마장을 방문하여 배팅에 몰두하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지만, 이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상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덕에 굳이 외출을 아예 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움에 달떠서 맛본 한국 음식을 매일 먹는 것이 슬슬 지루해지던 차에 몇 해 전 독일어 같기도 하며 울타리라는 뜻의 UUL이라는 식당이 생기면서 다국적 음식이 제공되기 시작해서 좀 더 시간을 허비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호텔로비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알 수 없는 파티의 참석자들이 프랑스산 샴페인이나 와인을 즐기는 모습을, 굳이 못하는 한국어로 소통 하려 애쓰지 않고도 구경할 수 있는 것이 나름의 재미였다. 현지인들은 가장 비싼 값에 장기 투숙하면서 남들과 접촉하지 않는 나를 호기심 있게 보기도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나는 여기서 히키코모리 형 외국인 투숙객 생활에 익숙하게 되어 버렸다.

이 호텔은 1986년 아시안게임을 한국에서 유치하는 기념으로 아시아 각국 선수들을 머무르게 하기 위해 준공 되었다. 여기는 300여 개의 룸이 있다. 호텔마다 별의 개수로 급을 나누듯이 이 건물 내부의 룸들 또한 7개의 급수가 있어 A급부터 G급까지 지어진 시기나 방에 마련된 부대 옵션들에 따라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 A, B급은 유명한 건축가가 직접 설계했다 하고 C부터 G급은 컴퓨터가 설계해서 숙박비가 더 저렴하다고 한다. 보통 도심 호텔에 조망권이 좋을수록 비싼 방이 위치하는 것과 달리 여기는 투숙객의 은밀한 사생활이 보장되는 땅속 깊이 있는 방일수록 더 높은 급의 비싼 곳이라 한다. 80년대 국제 체육 행사 특수가 끝난 후, 호텔 건물에 손님이 자주 들지 않자 방을 따로따로 내놓았고 방마다 제각각 소유주가 바뀌었으며 현재는 해외에 이 호텔의 방을 소유한 부자들도 많다고 한다. 다행히 내가 장기투숙하고 있는 룸이 위치한 건물 최 지하층 전체는 한국정부의 소유로 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2013년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도 객실 하나 없는 호텔분점을 열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곳 VIP 지하객실들은 내가 투숙을 시작한 2005년 이후 3년이 지난 2008년부터 현대식 레노베이션을 시작하였다. 여기는 30㎝ 두께의 철근-콘크리트 슬라브 구조로 지어졌고 지진에도 끄떡없도록 내진 설계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지하층 각 방에 도달하는 모든 경로에는 고객을 위한 4중 출입문과 지문인식을 통한 최신식 100% 방범이 가능해졌다고 하나, 나는 간혹 2인1조의 룸 서비스를 받는 것 외에 스스로 방에서 멀리 떠나 외출 후 다시 들어온 기억이 너무 오래 돼서 그 기능을 체감할 수는 없다. 여기는 이런 보안을 원하는 외국인이나, 부자이면서 동안인 현지 노인 투숙객들이 주로 묶는다. 그들은 나보다는 외출이 간간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세상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내가 묶고 있는 디럭스 룸, SC-05522호실은 정확히 A급이냐 B급이냐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정작 나는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지만, 나름 급수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는데 방문과 손잡이가 가죽으로 마감이 되어 있는지 여부나 룸의 옵션과 함께 방이 만들어진 시기로 나뉜다고 한다. 유서 깊은 외산 가죽마감은 정품이냐 밀수품이냐 아니면 그냥 목재냐에 따라, 또한 방에 비치된 비품들은 디자이너의 사인이 있는지 복제품인지, 특별한 가구가 내장 되어있는지에 따라 구분된다고 한다.

내가 장기투숙하고 있는 이 방이 A급이냐 B급이냐 왈가왈부하는 이유가, 출입문은 목재로만 되어 있는 반면 방안에 있을 것은 다 있기 때문이라 한다. 특이한 사항은 각각의 투숙객 방 화장실에 변기가 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이 있는데 변기가 없는 C급 이하의 방에 머문 투숙객은 어쩔 수 없이 호텔 로비의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는 텔레비전 공든 탑 옆의 공중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이 변기는 인간문화재 R. Mutt라는 장인이 1917년 제작한 몇 안 되는 제품으로 당시에는 남성소변기를 뒤집으면 여성도 사용 가능하고 대변 시에도 오물이 넘치지 않는다 하여 특허를 받은 명품이라 상당히 귀하다고 한다.

같은 층에는 내가 여기 올 때보다도 오래인 1991년부터 머문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만 역시 동안인 한국여자도 머물고 있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가끔 내 방 69가지의 풀 옵션 중 하나인 대형 창문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말은 안 통해도 그녀 또한 장기투숙 중인 나를 알 것만 같기도 하다. 그녀는 한이 좀 있는지 머리엔 꽃을 꽂고 어깨엔 나비를 올리고 온종일 공허한 눈으로, 멈춰버린 물레방아만 바라보고 있다. 추측컨대 젊을 때 꽤나 미인이었을 것 같은 그녀가 최근 들어 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가득 차 보인다. 소문에 의하면 2015년에 그녀의 친모인지 계모인지 불확실한 분의 임종을 직접 못 보아서 그렇다고도 한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불현듯 나도 이 숙소에서 얼마나 늙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체크인 시 투숙객 명단에 올린 사진을 검색해 보았다. 내 얼굴이 안 보인다. 저작권 협의 중이라고 한다. 난 실은 이제, 원래 생겨 먹은 대로 문밖으로 좀 돌아다니고 싶다.


저작권 협의 중








호경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01년 자원봉사 도슨트를 했고,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취재를 했다. 2015년부터 평가위원 및 심의위원을 맡았으며, 현재는 서울관의 ‹김수자-마음의 기하학›전에 관련하여 부분적인 용역 대행을 하고 있다.



김해주
주로 전시와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미술과 공연에 관련한 글을 쓴다. 시골 읍내 같이 생긴 서울의 변두리 동네에서 살면서 무척 바쁘지만 매우 무료한 이 일상을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한다. 지난 번 라이팅 밴드에서는 캐스터내츠를 맡았다면 이번에는 탬버린을 연주하자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김송요
저술가. 2D 2.5D 3D에 좋아하는 것이 하나씩 있고 현실세계에선 싫어하는 거 22530개지만 싫어하는 거 말하기를 좋아해서 글을 쓴다.
양식보다는 느낌!

김해주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서울 중심가에 현대미술관이 개관하고 드디어 국립현대미술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왔다는 듯한 반응이 떠돌 때에도 그런가보다 싶었다. 가기 좀 불편한 곳에 있고 그래서 자주 들르지는 않았지만 호적한 숲 속에 그것도 놀이 동산과 동물원과 함께 미술관이 자리잡은 것이 ‘잘못된 일’ 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미술관의 확장 프로젝트로서 도심 및 지방 분관 설립에 대해 말해 달라는 한 인터뷰의 질문에서 초대 관장 이경성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 시골에다가 미술관을 옮긴다고 얼마나 공격의 대상이 됐던지, “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보라. 이런 건 시내에서는, 종로에서는 못 보지 않느냐”라고 반박을 했는데, 일단 그들의 입장은 “어느 미술관이 저렇게 먼 데까지 가야 되느냐”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발 벗고 안방에 들어가듯 하는 미술관이 어디 있느냐, 어느 정도 노력해서 자기가 걸어가서 발견해서.. 그래야지”라고 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역대 관장 인터뷰’, [미술관 연구], p.6)

‘신발 벗고 안방에 들어가듯 하는 미술관은 없다.’ 는 말처럼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이 그렇게 편안한 일만은 아니다. 물론 일요일 교회에 가는 것처럼 차려 입고 단정한 몸과 마음으로 미술관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미술관에 간다는 것이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는 아니다. ‘어느 정도 노력해서 자기가 걸어가서 발견해서..’ 그래야 한다는데 사실 과천 현대미술관을 찾아가는 길은 많이 걸을 필요도 없다. 리프트도 있고, 코끼리 열차를 탈 수도, 그리고 셔틀버스를 탈 수도 있다.

현대미술관이 멀리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자각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이 자라는 환경에 미술관이 기본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관에 가는 것이 일상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미술관 자체가 인지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할까. 부산 시립미술관은 1998년 3월에 개관했다. 그때는 내가 고3 이었고 미술관의 개관은 관심사도 아니었다. 태어난 이후 그 도시를 거의 떠나지 않았던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미술관의 입구에도 안 가본 셈이다. 나에게 미술관의 입지 문제는 둘째치고, 미술관이 수도나 도로와 같은 기반 시설처럼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은 탑재되어 있지 않았고 시립과 사립 미술관을 구분하거나 갤러리와 미술관을 구분한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미술관이라는 단어가 일상의 어휘 목록에 없었던 것이다.

과천 현대미술관에는 대학에 입학한 후 가보게 되었다. 98년에 만들어진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을 통해 먼저 알았다. 영화에서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미술관과 동물원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없었지만, 조각 공원에 있었던 노래하는 동상이 인상적이었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그 조각 작품은 사실 지금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광화문에 있는 그 형제 격인 동상은 망치질을 하고 있지만, 좀 더 작은 크기의 동생 같은 과천의 동상은 노래를 부른다. 광화문은 망치질 과천은 노래, 뭔가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천에서 처음 본 전시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산 시립미술관은 2006년 부산비엔날레 일을 약 삼 개월 정도 하면서 드나들었다. 그 해 여름 나는 부모님 집이 있었던 범일동에서 악취가 풍기는 동천이라는 이름의 천변을 지나 — 최근에 청계천처럼 개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 지하철을 타고 시립미술관 지하 1층에 있었던 부산 비엔날레 사무실로 출근했다. 9월 초 비엔날레를 오픈하자마자 큰 태풍이 불었다. 외부에 설치했던 작업이 하나 무너졌고, 내가 담당했던 멕시코 건축가 겸 작가가 20 여 개의 빨간 애드벌룬을 설치하는 작업도 태풍을 염려하여 비엔날레 오픈 직후 철거했다. 그리고 태풍과 상관없지만, 설치 과정에서 무너진 작업이 있었다. 그 외국 작가는 설치를 도우러 왔던 여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무너지는 설치물 쪽으로 몸을 던졌고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그 작가는 한 해 전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김장용 장독대를 마음에 들어 해서 작은 것을 하나 사다가 비닐로 둘둘 감아 가지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나는 얼마 후 이 장독대가 깨진 모양으로 파리의 한 갤러리에 전시된 것을 보았다.

과천 현대미술관이나 부산 시립미술관은 규모와 생김이 매우 다르지만 무언가 공통적인 느낌이 있는데 아마도 대리석 마감재의 촉감이나 냄새가 아닌가 싶다. 남한의 많은 국공립 미술관이나 극장, 문예회관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건물 다 바닥과 벽체가 반들반들한 대리석 마감재로 되어 있다. 미술관이나 문화회관들은 왜 대리석을 좋아할까? 나에게 한국에서의 미술관에 대한 초기 감각은 이 대리석의 기운과 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과천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생긴 1986년은 아시안 게임이 있었던 해이다. 아시안 게임에 맞춰 미술관을 개관하기위해 관계자들은 부던히 애를 썼다고 한다.1 1986년이면 일곱살이었을텐데 사실 내게 아시안 게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유치원을 겸하던 피아노 학원에서 손등을 맞아가며 피아노를 연습하던 것과, 그 무렵 VTR이 보급되던 시절이라 서비스로 딸려온 소림사 비디오를 무한히 돌려봤던 것 정도가 일곱살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의 올림픽에 대한 기억은 분명하다. 호돌이도, 오륜기도 그리고 굴렁쇠 소년이 운동장으로 들어오던 모습이 떠오른다. 굴렁쇠 역시 그 해에 내 어휘 목록에 진입한 단어다.

1 • “국립현대미술관은 제 5공화국의 문화적 업적이자, 동시에 이런 일련의 스펙터클을 보조하는 또 다른 스펙터클로서 임무를 부여받았다.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린 아시안 게임보다 1개월여 앞서서 8월 25일에 개관해야 했다. ‘국립’이라는 한정된 역할 때문에 미술관이 정치적 상황의 언저리에서 미적 경험의 장 뿐만 아니라, 보여주기 또는 과시용 선전물로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약점을 태생부터 가지고 있었다. 미술계와 미술관 종사자들에게는 이 미술관 건물 건립이 한국 현대미술의 규범을 본격적으로 정하고, 그동안 약 80년에 걸친 현대미술사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었던 반면에, 정작 그 미술관을 지원한 정권은 주변적인 문화계에 대한 선심이자 더 큰 스펙터클을 위한 보조적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기억, 욕망, 스펙터클: 국립현대미술관 만들기, 양은희, p.183

국립 현대미술관의 1988년 기록 사진들에는 유난히 올림픽과 관련한 행사 사진들이 많다. 올림픽 문화예술 축전, 88 미술전과 함께 88의상전을 위해 미술관을 런웨이로 꾸며놓은 장면도 보인다.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정당 김한동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찾아왔고 사마란치 IOC 위원장도 찾아왔다.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옆에는 이후 서울시장과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닌 박세직 올림픽 조직위원장이 서있다. 경상도 구미 태생에 육사 출신인 박세직은 교회 장로님이기도 했다. 2009년 7월 과로가 원인이 된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명인사로 가득한 그 해의 파일에 몇가지 특이한 사진들도 눈에 띈다. 그 해는 조각 공원을 조성하던 해였는지 조각 제막식 사진이 유난히 많았다. 제막식은 조각 위에 하얀천을 덮어 씌워 놓았다가 흰장갑을 끼고 줄을 당겨 그 유령같은 실루엣에서 형체가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조각가 베티 골드 작품 제막식이 인상적이었다.



어쩐지 베티 골드라는 이름은 한 번 가 본적도 없는 LA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LA에 살고 있는 짧은 갈색 파마 머리에 굴렁쇠처럼 둥근 귀걸이를 착용한 또 다른 미시즈 골드를 상상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동유럽 이민자 출신의 변호사였고 그들은 교외의 이층 짜리 집에 살고 있었으며 마당에는 스프링쿨러가 돌아가고 있었다. 사진 속의 베티 골드 여사는 야외 조각 공원에 작업을 설치하고 이를 축하하는 중이었다. 붉은 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고 몇 개의 부분으로 나뉜 철제 조각이 보인다. 그 형태가 마치 종이로 오려낸 것 같다. 사진 속에서 베티 콜드는 분홍색 한복 저고리와 붉은 색 치마를 입고 있다. 자신의 조각과 색깔을 맞추었나보다. 초록 잔디 위에 설치된 빨간 조각과 붉은 계열의 한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이 대비된다. 바닥은 초록, 하늘은 파랑, 조각은 빨강일테지만 오래된 사진이라 그런지 그날의 날씨 탓인지 선명한 RGB로 보이지는 않는다. 조각 작품의 이름은 ‘가이꾸’. 하와이 말로 높은 파도라는 뜻이다. 하와이. 엘에이. 붉은색 치마 저고리. 세 단어가 마치 아이들 고무줄 노래 부르는 것처럼 입 속을 굴러간다.

또 하나 인상적인 사진 역시 조각 공원과 연관된 장면이다. 그해 가을에 현대무용 공연이 있었던 모양인데 사진 속 현수막에 ‹담배먹고 맴맴›이라고 제목이 써 있다. 이 단어를 읽는 순간에도 역시 반사적으로 멜로디가 따라왔다.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로 시작하는 오래된 동요로 1928년 윤석중이 쓴 글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것인데 그 후렴구가 고추먹고 맴맴, 담배먹고 맴맴이다. 가사는 가족들이 모두 일을 보러 집을 비운 사이에 혼자 남겨진 어린이가 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좀 더 느리고 구슬픈 동요 ‘섬집아기’와 유사한 내용이라 느꼈다. 1988년 9월 3일 오후 여섯시 반, 현대미술관 조각 공원에서 열린 공연 ‹담배먹고 맴맴›에 어린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여남은 명의 성인 남녀 무용수가 흰색 또는 분홍색의 레오타드를 입고있다. 이들은 두 개의 조각상을 중심으로 잔디 위에서 대열을 만들거나 몸을 크게 움직이는 형태를 만들기도 하고 조각 위로 올라가 웅크리기도 한다. 언뜻 봐도 소위 ‘현대무용’의 대형과 의상이 드러나는데 이 노래나 제목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이 공연에는 어떤 음악이 연주되었을까? 기사를 찾아보니 이것은 김복희, 김화숙 무용단의 공연이었다. 김복희, 김화숙 두 안무가는 2년 전 소극장 공간사랑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 접한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김복희, 김화숙 마치 자매 같은 이름이지만 이들은 대학 친구들이었고 1992년 각자 사십대 중반이 될때까지 약 20년을 함께 작업했다. 1980년대 소극장들이 다수 생기면서 현대 무용 공연들도 조금은 대중화 되기 시작했는데 김복희, 김화숙은 이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젊은 안무가들이었다.2 특히 현대무용 형식에 한국적인 내용을 담는 작업들을 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이미 1980년 ‹고추먹고 맴맴› 이라는 공연을 만들었고, 1988년 ‹담배먹고 맴맴›을 공연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같은 해에 ‹고추먹고 맴맴, 담배먹고 맴맴맴›이라는 공연을 했다고 하니 아마도 앞서 두 공연을 합쳐서 만든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노래와 안무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리송하다.

2 • 현대무용은 1980년대에 소극장 운동이 전개되면서 무용의 다양화와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무대 공간의 확대로 대극장이나 소극장 내에서 공연이 이루어 졌던 무용이 무대 밖으로 나와 야외 공연으로 이루어졌는데 1984년 4월에 이정희 무용단에 의해 ‘거리의 춤’으로 시도되었다. 이정희 무용단은 계속해서 1986년 5월과 1986년 3월에 동숭동 대학로와 반포지구 등지에서 야외공연을 가졌고, 1987년 김복희, 김화숙 무용단은 현대 미술관의 초청으로 특정 장소에서 야외공연을 가졌다. — 1980년대 한국 사회 구조에 나타난 현대 무용 연구, 이화여대 무용과 최윤서 석사 학위청구 논문, 2001, p.38



1988년의 기록 사진첩에서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직원 생일 잔치 장면이다. 미술관의 많지 않은 사진 기록들 속에서 직원 생일 잔치 사진이 들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홀처럼 넓은 공간인데 루버로 마감한 천정과 바깥 풍경이 보이는 통유리창으로 봐서 지금의 식당 자리인 것 같다. 테이블이 사각형으로 도열해 있고 그 위에 음식과 음료수가 간격을 맞춰 놓여져 있다. 사진은 두 가지 유형인데 하나는 나이가 드신 어른이 마이크 앞에 서서 뭔가 연설을 하고 있고 테이블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약간 굳은 자세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이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나무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고 있는 장면이다. ㅁ 형태로 도열한 테이블들 한 가운데에 또 다른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 두 개의 케이크가 놓여 있는 것으로 봐서 생일을 맞은 사람은 두 명이었던 모양이다. 하나는 크림 케이크, 다른 하나는 초코 케이크이다. 그러나 사진 속에는 잔치의 주인공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날 생일을 맞은 직원 두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이 날은 몇 월 며칠 이었을까? 미술관이 간직하고 있는 기록 사진은 김복희 김화숙이 안무한 ‹담배먹고 맴맴›에 어떤 노래가 흘렀는지, 그 날 생일 잔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리고 베티 골드는 왜 한복을 입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양식보다는 느낌!


11Dot2

30년의 시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글과 녹취, 기억, 떠돌아다니는 말들이 있고,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30년 전에도 지금도 실제 존재하고 있는 사물과 사람들, 건물 등이 있을 것이다. 30년의 역사를 재증명하는 이 글은 “2016년이라는 시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글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사진 아카이브는 연도 별로, 행사 별로 정리되어 있다. 일견 객관적인 분류 체계를 갖춘 사진들은 과거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지표이지만, 막상 사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지금 사진을 보고 있는 사람이 겪어 온 또 다른 과거이거나 혹은 현재이다.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이 자신의 시간으로부터, 자신의 공간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진 속 이미지를 읽어서 구축하는 미술관은 사진을 읽는 사람의 기억의 시간과 공간이 합성된 혼성의 메타-미술관이다. 약간의 실제와, 사진 찍힐 당시의 상황과, 남겨진 이미지와, 이미지를 읽고 있는 사람의 기억이 혼합된 변종의 결과물이다.

사진 20-08-10-08을 관찰해보자. 이 호칭은 글쓰는 사람의 임의적인 분류 체계로 매겨진 일련의 순서에 따른 번호이다. 사진첩은 특별한 인물의 방문을 기념하거나, 오프닝, 사생대회 등과 같은 행사를 기록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수백 장에 달하는 사진들의 구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거의 비슷하다.) 알아 볼 수 없는 얼굴들의 일정한 배열과 변함이 없는 장소들- 미술관 로비, 입구, 제 1 전시실과 같은-이 결합하면, 끝없는 반복 속에 사진은 영원불멸의 존재감을 획득한다. 공간에 대한 기억은 시간을 정지시키는 마술이다. 미술관을 방문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5년 전이든, 7년 전이든, 혹은 30년 전이든, 큰 상관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 공간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제 1 전시실의 높은 천장 속 안쪽 벽감 같은 곳이 그러하다. 비스듬하게 전시실의 벽이 찍힌 사진 20-08-10-08을 보면서, 벽의 촉감을 떠올린다. 전시실의 벽은 하얗고 매끄러워 보이지만, 막상 만지면 거칠면서도 차갑고 촉촉한 느낌이 있다. 이 벽은 틀림없이 30년 전부터 마지막으로 그 벽을 만졌던 2015년 8월까지 그대로 차갑고 촉촉하게 서 있었을 것이다. 사진 속에서 벽은 시간을 말하지 않는다.

사진 40-39-316은 전시 오프닝의 광경을 담고 있다. 초대객들은 전시된 작품을 가운데 두고 반원형으로 둘러서 있다.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자세로 작품을 보고 있거나 서로 마주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적이고 경직되어 있다. 검은 혹은 회색의 양복을 입고 있는 일부 인사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설명을 듣고 있다. 이 사진 더미와 가까운 곳에 배열된 사진 27-61-18-11은 미술관 정면의 전경을 담고 있다. 다시 등장하는 양복의 사람들이 열을 지어 서 있고, 가장 높아 보이는 인물이 사진의 중간 즈음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 속에서 이들은 이제 막, 미술관에 도착해서 열을 지어 미술관을 향해 가고 있다. 알지 못하는 양복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중요함”을 암시하는 이미지의 배열이다. 미술관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마주치는 자원봉사자와 청소하는 사람들, 작품 관리원들은 거의 사진에 보이지 않는다. 알아볼 수 없는 얼굴들과 변함없는 건물들, 비슷한 사람들의 도상들 속에서 미술관으로 향하는 시간은 또 한 번 길을 잃는다. 이 사진들이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연도와 날짜들을 기록하려고 의도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 미술관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진은 특별한 날들의 기록이자, 아무것도 아닌 날들의 기록일 뿐이다. 실제로 전시를 만들고 미술관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사진에 기록될 만한) 이벤트가 있는 날들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다. 큰 오프닝 날들은 거의 실질적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행사를 준비하는 일이 전부이다. 매해 예산을 따고, 설비를 보수하고, 인력을 고용하고, 작품을 보존하고 컬렉션 하는 일들은 사진이 찍히지 않는 날들에 이루어졌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진이 보여주기로 한 미술관의 시간의 이미지들은 주로 그저 그런 행사의 날들로만 이루어진 셈이다. 어떤 순간이 이미지로 기록이 될지 결정한 것은 물론 미술관이겠지만, 대부분이 이러한 기념사진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생각하면, 무언가 이상한 지점이 있다. 사진은 특별한 시간과 공간만을 기록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한 학기 수업을 듣고 사진으로 기록한다고 가정했을 때, 대부분의 사진 이미지는 수업이 시작하는 날과 마지막 날에 몰려 있을 것이다. 수업 중간에 이루어졌던 치열한 토론의 장면이나, 수업의 성공/실패 여부를 가늠하도록 하는 시험의 순간은 기록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순간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미처 기록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중요도와 상관없이 사진으로 남기기로 한 시간들은 관습적으로 정해진 것일까?

문득, 아는 얼굴을 발견하였다. 1988년부터 2005년 까지 담겨있는 사진첩에서 그/그녀는 사진 79-10-07에서 등장한다. 그/그녀의 얼굴은 3/4 정도 밖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는(혹은 현재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인지하는 데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그녀는 얼굴에 약간 미소를 띠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멈추어 있던 시간은 갑자기 빠른 속도로 과거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 얼굴은 2015년에 기억하고 있던 얼굴 보다 좀 더 마르고, 약간 덜 활기찬 느낌이지만, 그룹 속에서 활짝 웃고 있다. 약간 피곤하지만 즐거워 보이는 표정과 젊고 마른 얼굴, 그/그녀의 개인사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대강의 연도에 이어 관장 재임시기까지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시절의 그/그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그녀에게 들은 이야기에 아카이브 속의 사진이 더해져서 새로운 과거의 사람이 완성되었다. 더불어 그/그녀의 기억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특별한 연도의 미술관의 모습이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다. 79-10-07이 속한 연도의 미술관은 모르는 얼굴과 변함없는 건물만이 찍힌 다른 연도의 미술관과 “다른 미술관”이다. 이미지가 불러일으킨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 미술관은 가짜이기도 하지만, 진짜의 조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사진첩은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가 경고한 것처럼 독약이자 해독제인 파르마콘(Pharmakon)이다.

따라서 미술관이 겪어 온 30년이라는 시간이 보여주는 미술관에 대하여, 사진 아카이브는 디디 위버만(Geroges Didi-Huberman)의 걱정스러운 의문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지는 우리를 상상하도록 하고, 풍부하고 뛰어난 상상은 이해할 수 있는 체계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 방해가 될 뿐이다.” 사진 아카이브는 기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대만큼 미술관에 대해서 솔직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사진 이미지 앞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사진을 읽고 있는 사람의 “상상의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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