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케묵은 표현이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박가희
1986년부터 2005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첩에는 마치 반복되는 역사처럼 얼굴만 갈아 끼운 듯 비슷한 배경과 옷차림을 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거의 무명처럼 보이는 인물들 가운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커팅식’과 ‘악수’라는 제스처를 빵조각 삼아 거대서사가 낸 ‘길’을 추적해본다. ‘국립’이라는 단어가 부여하는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부합하는 이 사진들을 토대로,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역사적인 개관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을 재구성해본다. 행위의 세 주체자들을 중심으로 건립 당시의 정황과, 각자의 위치에서 이 건물에 투여했을 각기 다른 희망을 상상해본다. 앞으로 등장할 이미지와 조각 글은 조응하며 신문 기사와 보도사진처럼 당시를 기록하고 묘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지시된 시간과 인물이 이미지와 정확히 상응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서로 어긋나 있다. 이는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 속에서 주어와 시제만 바꿔도 결국 상상이 현실에 닿는 듯한 기시감을 주기 때문이다.
# 1986년 8월 25일, 개관 커팅식에서
테이프를 손에 쥐고, 커팅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문뜩 그날이 떠올랐다.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화계 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정확히 1980년 10월 26일, 그날 제29회 국전 개막식 행사가 열렸다. 9시 30분경 덕수궁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한 ‘그’는 여러 수장들과 악수를 나눈 뒤 개막식 테이프를 끊고 약 40분 동안 전시를 관람했다. 전시를 돌며 ‘그’는 수상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격려했다. 참석한 작가들은 ‘그’에게 야외 전시장이 필요하다고 건의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문공부 장관에게 이를 검토해 달라고 지시했다. 약 두 달 후 ‘중기재정계획서’에 미술관 건립 안이 제출되었다. 바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청사진이었다.
그날부터 오늘 국립현대미술관의 개관 커팅식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연일 터지는 집단들의 행동, 불안정한 남북 관계, 비행기 폭발사고 등 큰 일을 앞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그’에게 복잡 다난한 상황을 타계할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과 같은 굵직한 국가적 이벤트와 함께 “제5공화국 국정지표”에 “교육현신과 문화창달”을 실현해 줄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립을 지시했다. 마침 ‘그’가 해외 순방 중에 둘러본 해외 미술관들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 찰나에 먼저 푸념 아닌 좋은 제안이 들어왔고, “국민 모두의 문화의식을 높여 주고 문화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추도록 하는 국민 교육장”으로서의 국가 최고의 미술관 건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노력의 성과가 오늘 결실을 본다.
가윗날 위에 테이프를 올려두고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프를 응시하자니, 모든 것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생각도 잠시 사회자의 멘트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그’는 이내 시원하게 테이프를 잘라냈다.
싹. 뚝.
— “전 대통령, 국전 개막 테이프 끊어 야외전시장 검토하도록”, 경향신문, 1980.10.2
—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한국일보, 1986. 8. 26
—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 프로젝트 ‹기억의 공존›, 2016, 건축 연표 참고
# 1986년 8월 25일, 개관식을 마치고
82년 가을 즈음 ‘그’는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국에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위하여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미술관을 새롭게 건립하기로 했으며, 이를 위한 현상 설계에 참여할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한국을 떠나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땅한 때를 찾지 못해 미국에 남아 일을 하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반가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그’는 미술관 설계는커녕 한국에서 삽도 떠본 일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제안이 들어온 것도 놀라웠지만, 당시 한국의 굵직한 공공건축은 거의 다 맡아서 설계하고 있던 김수근 선생과의 경합 끝에 ‘그’의 설계안이 최종 선정된 것 또한 매우 이례적인 결정처럼 보였다. 새로운 얼굴을 원했던 심사위원들의 의중도 있었지만, 1만여 평을 설계한 ‘그’의 시안은 김수근 선생의 그것이 비교적 ‘아담’했던 것에 비해 매우 웅장하고, 권위적인 시안으로 여타 해외 미술관과 견주어도 그 위상이 뒤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 것 같다. 시안이 선정되고 난 후 건립되기까지 여러 가지 마찰과 갑작스러운 예산 삭감 등 난항 속에서도 결국 오늘이 왔다.
개관식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한 번 함께 일했던 이들과 미술관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그’에게 이경성 관장이 다가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주어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머쓱하게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며 ‘그’는 “왠지 늘 고국에 빚을 진 듯, 마음 한쪽이 불편했는데, 이렇게 빚을 청산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다”라고 겸연쩍게 말했다. 덧붙여 “일반적으로 대규모 공공건물을 지을 때는 정부나 관계 당국자가 설계에 지나치게 관여, 건축설계자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이번 미술관 건축에는 설계에 관한 한 모든 권한을 줘 마음껏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 “「문화」에도 졸라매는 허리띠 현대미술관 건립 난항”, 동아일보, 1983. 9. 12
— “과천 새 국립현대미술관 설계자 김태수 씨”, 동아일보, 1986. 8. 27
—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시공사, 1998
— 김태수, 「국립현대미술관 설계과정을 기억하여 본다」, 2006
# 1986년 8월 25일, 개관식 중
악수를 청하며 다가오는 이가 ‘그’에게 던진 질문은 매우 날카로웠다.
“이 커다란 건물을 어떻게 채울 생각입니까?”
“어떤 논리와 배경에서 미술관 건립이 추진되었건 국립현대미술관 본연의 임무에 부합하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으로 키워갈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대여전을 줄이고 기획전과 상설전을 확대할 겁니다. 협회나 조직 등이 자신의 영향력을 앞세워 전관을 차지하고 벌이는 단체전이나 그룹전은 최소화할 거예요. 또, 미술관이라는 것, 그 정체성은 소장품에서 나오잖아요.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보여줄 좋은 소장품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해외 유수 기관들과의 소장품 교류를 통해 국제 미술을 소개하고, 우리 미술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려고 해요.”
말을 마치며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문공부 장관에게 몸을 돌려 푸념 섞인, 그렇지만 강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예년보다 줄어든 소장품 예산을 회복하고, 전문성을 갖춘 학예직을 늘리는 것이 급선무다”, “미술계의 소원이니 잘 부탁한다”며 재차 강조했다.
어딘지 익숙한 대화다.
— ““세계적 전시관 만들겠다” 재취임한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경성씨”, 경향신문, 1986.7.30
— “국립 현대미술관장 이경성 씨(1919년 2월 27일생) 원고 쓸 시간조차 없이 분주한 나날”, 경향신문, 1982.2.27
— “대담/국립현대미술관 전°새 관장 이경성°임영방씨 학예직 중심 직제개편 제1과제”, 한겨레, 1992.5.29
—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시공사, 1998
참고문헌
양은희, 「기억, 욕망 그리고 스펙터클: 국립현대미술관 만들기」, 2007.
목수현, 「한국근현대미술사에서 제도에 관한 연구의 검토 」, 2012.